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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 금일도 다시마 이야기
제목 완도 금일도 다시마 이야기
작성자 완도이야기 (ip:)
  • 작성일 2008-08-16 22:12:20
  • 추천 추천 하기
  • 조회수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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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퍼런 옥빛, 쪽빛. 그 맑은 바다 속에 다시마가 자라고 있다.
그 바다를 보는 것만으로 모자람이 없었다.
퍼런 옥빛, 쪽빛. 바닷길 내내 마음은 바다 빛깔에 쏠려 있었다. 잔물결만이 하르르 번지는 푸른 바다, 그 물속, 물고기들은 어느 빛깔로 꼬리를 흔들며 바닷말들은 또 어느 빛깔로 너울거릴까.
푸른 물빛이 이끄는 대로 가다 닿은 곳, 금일도 일정항.

외침 없는 ‘평화로운 섬’이라 해서 ‘평일도(平日島)’

섬의 원래 이름은 ‘평일도(平日島)’. 남해안에 있는 다른 섬과 달리 외부의 침범을 받은 적이 없는 ‘평화로운 섬’이라는 데서 비롯됐다. 그러나 주민들은 ‘평일도’ 보다 ‘금일도’라 더 많이 부른다. 행정명칭이 완도군 금일읍(金日邑)에 속한 섬이기 때문.

금일도는 강진 마량과 고금도 사이 연륙교가 생기며 뭍에서 가까워진 섬. 고금대교를 건너 고금도, 고금도와 이어진 약산대교를 건너 약산도, 약산도 당목항에서 배를 타면 금일도가 금방이다. 섬으로 드는 철부선이 하루 22회에 운항, 20여 분 소요, 갈수록 금일도를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반도(半島)와 곶(串)이 돌출하여 들쭉날쭉한 해안을 가진 금일도. 물 맑고 모래밭 좋기로 이름난 금일해수욕장, 완도군 방풍림 중 송림으로서는 가장 크고 아름다운, 수령 200년 된 해송 1000여 그루가 자태를 뽐내는 월송리 솔밭 등 소문난 곳이 많다. 향 진한 유자가 많이 나는 섬이고 동백리를 비롯해 몇몇 마을에는 아직도 두름박(태왁)에 의지해 홍합 전복 해삼 등을 따는 무레꾼(해녀)들이 남아 있기도 하다.

그러나 금일도 하면 떠오르는 것은 ‘다시마’.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다시마 양식이 시작된 곳이며 지금도 전국 생산량의 70퍼센트 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이맘때 금일도 바다는 온통 다시마 양식장에 띄워진 하얀 부자로 가득하다.

   
▲ 허리 굽혀, 바다까지 손 내밀어 해야 하는 반복된 작업,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밭마다 널린 다시마에 금싸라기 같은 햇볕

섬 안에서도 다시마 양식을 가장 많이 하는 마을은 도장리와 척치리. 보리 콩 고구마를 키우던 밭에는 어김없이 노란, 파란, 빨간 망이 깔렸고 그 위에 검은 다시마를 널어놨다. 바람에 날릴세라, 망으로 한 차례 덮어놓았다.

“요 3일이 금일도 사람 살리는구먼.”
도장항 선창에서 들은 한 촌로의 말. 장마가 일찍 왔다. 다시마 채취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3일 내내 내리쬐는 햇볕은 금싸라기였다. 앞으로 며칠 동안 더위가 이어진다는 일기예보는 큰 위안이다.

다시마 채취는 원래 5월 중순께부터 시작돼 6월 중순께면 끝이 난다. 그러나 올해는 이른 장마로 7월 중순이 돼야 일이 마무리 될 것이라고 한다.
“작업할라고 전국 각지에서 인부들 불러모았는디 비가 와 분게 싹 돌려보냈어. 장마통에 올해 다시마 농사는 반은 망쳤제. 소득 못 올려 젊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이네.”

오후 1시쯤 되자 도장항으로 용달차들이 하나 둘 들어선다. 아버지와 아들, 부부 그렇게 2명이 한 조다. 각각 선창에 정박해 놓은 배의 닻을 올리고 바다로 말끄러미 빠져나간다. 배는 1.78톤급 소형어선이다. 이른 아침에 다시마를 거둬 널어놓고 두 번째 바다에 나가는 것이다.

도장리 임대신(54)·윤방금(51) 부부의 배에 올라타 다시마 작업을 따라나섰다. 윤방금씨는 “지금 나가믄 4시간 동안은 바다에 있어야 한디, 날 뜨건디 어찌게 있을라고 할까” 하며 말렸다.
물살을 가르는 소형어선의 빠른 속도는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게 했다.

한창이다. 넓게, 둥둥 떠 있는 흰 부자들 사이사이 다시마를 건져 올리는 데 여념이 없다.
배가 멈춘 곳은 금일도와 약산도의 가운데 바다. ‘평화로운 섬’이라는 것을 강조라도 하려는 듯 바다는 파도 하나 없이 고요하기만 하다. 물빛, 그 속으로 뛰어들고 싶을 만큼 맑은 바다다.

   
▲ 다시마를 건져 올린다. 거무스름한 윤기가 번들번들 보드랍다.

“다시마는 물발 쎈디를 좋아라 한게 일하기가 힘들제”

부자가 떠 있는 100미터 가량의 긴 줄, 그것을 한 줄이라고 하고 이번 오후 작업은 두 줄을 해내는 것. 다시마는 줄에 대략 30미터 간격으로 붙어 있다.

작업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줄 따라가며 다시마를 건져 올리고 물분사기를 이용해 씻어내고 다시 바닷물에 헹궈내 차근차근 정리하는 것. 그러나 허리 굽혀, 바다까지 손 내밀어 해야 하는, 반복된 작업,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윤방금씨는 “다시마 하는 사람들 허리 안 상한 사람이 없어. (다시마를 걷어올리려면) 배 깔고 해야 하기 때문에 가슴이 멕히요” 하고 말한다.

임대신씨는 “막판 작업이라 요즘은 장난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다시마가 가장 좋을 때, 다시마 채취가 한창일 때는 일꾼들 데리고 새벽 3시에도 나가 불 켜놓고 작업을 해야 한다. 채취하는 양이 많아 말리는 데도 애로가 따른다. 지금 작업은 부부 둘이서 널어 말릴 수 있을 만큼만 하는 것. 하지만 그 일 또한 하루를 꼬박 쏟아 부어야 한다.

임씨가 다시마를 건져 올리기 시작했다. 양식 줄에 붙어 자란 개몰을 뜯어내고 들어 올린 다시마는 ‘거대했다’. 길이나 잎 넓이가 생각지도 못했을 만큼 큰 바닷말이다. 짙은 갈색의, 거무스름한 윤기가 번들번들 보드랍다. 햇빛이 닿자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거린다.

“이런 것이 아무 데서나 되는 게 아녀. 뭍하고 가까운 데는 미역은 해 묵어도 다시마는 못 해 묵어. 수심 얕은 데는 뻘이 올라와 버리거든.”
물 맑은 금일도다. 물이 맑아야 햇빛이 잘 투영돼 다시마가 잘 자란다. 무엇보다 금일도는 다시마가 커 나갈 수 있는 깊은 수심과 물발이 있다. 수심과 물발이 받쳐줘야 양식이 가능하고 깨끗한 다시마를 얻어 상품으로 내놓을 수 있다. 수심이 얕고 물발이 없으면 다시마에 뻘이 오른다. “바다에 일하는 사람들은 물발이 쎄면(세면) 고약스러운디 다시마는 물발 쎈디를 좋아라 한게 일하기가 힘들제.”

도장리의 경우 5년마다 음력 7·8월께 제비뽑기로 다시마 양식어장을 가르는데 물발이 있는 먼 바다와 뭍에서 가까운 바다를 구분 지어 바다를 활용한다. 집마다 다시마가 잘 되는 한 곳과 덜 되는 한 곳씩을 공평하게 나눠 가지는 것.

   
▲ 김창헌 기자
   
▲ 건져 올린 다시마를 물분사기를 이용해 씻어내고 있다.

포자줄기 솎아내야 하는 겨울, 바다에 있는 날 더 많아

건져 올리고 씻어내고 헹구고 쌓고. 작업하는 속도가 급하다. 시간에 맞춰 밭에 말려 놓은 다시마를 걷어야 하고 또 지금 해낸 다시마를 시간에 맞춰 널어야 한다.

한 줄 작업이 끝난 것은 대략 1시간 반 정도. “사람 하나 더 있는 것이 이라고 다르고만. 바다에 살아도 쓰겄소.” 윤방금씨에게 칭찬을 받았다. 한 줄을 끝내고 나서야 임씨는 담배를 태우고 윤씨도 갑판에 주저앉아 얼음물을 마신다. 바다에선 사람 말소리도 갈매기 울음소리도 더 크게 들린다는 것을 또 한 번 경험한다. 꽤 떨어져 작업하고 있는 사람하고도 평상시 육성으로 얘기를 나눈다. 뱃머리에 걸터앉아 담배를 태우는 한 아저씨의 웃는 모습이 맑은 하늘과 푸른 바다와 너무도 잘 어울린다.

임씨는 “바다에 나오믄 일은 되도(힘들어도) 시원한게 좋아. 사방이 물인게 열기가 없잖애. 천지사방 뻥 뚫린 데 있다가 집에 들어가믄 갑갑해불제.” 바람 같은 말. “사는 거 욕심부릴 것 없어. 맘이 자유로워야 뭐시든 하는 법이여.” 바다를 곁에 두고 사는 사람의 말이었다.

   
▲ 어부의 휴식시간.
다시마는 11월 뻗대놓은 줄에 포자를 끼우며 시작된다. 포자가 길어나는 섣달, 정월에는 포자줄기 솎음질에 들어간다. 질 좋은 포자줄기 7∼8개 정도만을 남기고 솎아낸다. 겨우내 이뤄지는 작업으로 찬 바람에, 찬 물에 손을 담그고 일해야 하는, 곤혹스런 작업이다. 미역 채취와 일이 겹쳐 집에서보다 추운 바다에 있는 날이 더 많다. “추운게 눈이 부어 불어.”

4월부터는 다시마 줄기가 자라나며 부자 수를 늘려나간다. 이곳 사람들은 다시마가 굵어지는 것을 보고 ‘약이 오른다’ ‘약이 찬다’라고 말한다. “뿔통(부자, 부표) 달아노믄 약이 차제. 갈수록 약이 올라”라고 말한다.

포자 올리기 전, 양식장 설치 때의 작업이 궁금해진다. 양식줄을 바다에 고정시키기 위해 바다 밑으로 ‘포’를 쏜다. “그것만 쏘는 1톤짜리 배가 있어. 소나무를 연필 마니로(처럼) 깎아갖고 줄을 매놓고 바다 속으로 ‘퐁’ 쏘제. 그게 박힌게 줄이 안 떠내려가고 다시마를 할 수 있제.” 바닥이 암반으로 되어 있어 소나무를 박지 못하면 큰 돌을 사다가 그 돌에 줄을 묶어 빠트린다. 바다 속을 훤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어서 소나무를 박아야 할지 돌을 빠트려야할지 안다.

   
▲ 해지기를 기다렸다가 바다에서 거둬들인 다시마를 넌다. 선선할 때 널어야 상품 가치를 할 수 있다.
   
▲ 다시마를 많이 하는 도장리 밭들은 모두 다시마 건조장이다. 종일 말린 다시마를 거둬들이고 있다.
   

“풍작이믄 시세 없고 시세 좋으믄 낼 것이 없고”

다시마 두 줄을 해내자 배는 다시마로 가득 찼다. 멀리, 가까이 보이는 작업배들도 다시마의 검은빛이 그득 실렸다.

선창에 도착해서는 걷어올린 다시마를 용달차에 싣고 곧장 밭으로 내달린다. 도장리 척치리 등 미역 다시마를 많이 하는 마을의 밭은 순전히 바닷말을 말리는 데 이용된다. 말리기 좋게 자갈을 깔아놓았다.
어제 저녁과 아침에 널어놓았던 다시마를 차근차근 거둬들인다. 손수레도 다시마 크기에 딱 맞게 만들어져 있다.

다른 때보다 조심스럽게 다시마를 다루는데 지금 다시마 값이 있기 때문이다. 장마로, 다시마 생산량이 줄며 값이 올랐다. 두껍고 넓고 까맣고, 약 잘 오른 상급 다시마는 1킬로에 4900원 선. 임씨는 “풍작이믄 시세 없어서 쩔쩔매고 시세 좋으믄 다시마 낼 것이 없어 쩔쩔매고, 바다농사나 논농사나 똑같애”라고 말한다.

말린 다시마 다 거둬들였지만 바다에서 막 해온 다시마는 널 생각을 안 한다. 용달차 그늘에 누워 쉰다. 햇볕 짱짱한데 아직 널 때가 아니라고 한다. 지금 널어버리면 모든 게 ‘헛수고’다.
“요런 강한 햇볕에 마른 것은 밤이슬 맞으믄 노래지고 소금간이 하얗게 펴 불어. 상품 가치가 없어져 불제. 다시마가 까다로운 거여.”

해지기를 기다리는 거다. 다시마 건조는 선선할 때를 이용한다. 아침 작업에서도 오전 10시까지는 널어야 상품가치가 있다. 땡볕에 갑작스레 말린 다시마는 빛깔이 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잘 부서져 내다 팔 수 없다.

다시마는 햇빛만 보고 하는 일이다. 비가 오지 않더라도 구름 낀 흐린 날에는 다시마 채취를 못 한다. 말리는 것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수협 공판장에 내놓지도 못하고 그대로 버려야 한다. 임씨의 밭 한구석에도 날씨 변덕 때문에 망친 다시마가 짚더미처럼 쌓여 있다.

   
▲ “손이 하도 많이 간게 ‘다시는 안하마’ 해야 한디 일이 어찌 그라고 된당가.”
   
▲ 공판을 보기 위해 다시마를 쌓고 있다. 올해는 이른 장마로 수확량이 예전만 못하다.

“8월부터 또 양식줄 다듬고 뿔통 다듬고 또 시작이여”

안기태(76) 할아버지와 조정갑(74) 할머니는 산아래 응달진 곳이라 해온 미역을 널고 있다. 경운기에서 끄집어 와 한 가닥 한 가닥 펼쳐 넌다.

안기태 할아버지는 금일도에 다시마가 시작될 때 얘기를 해준다. 금일도는 60년대 이전만 해도 농업이 주된 일이었다. 벼 콩 고구마 보리를 키웠다.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김양식은 논밭보다 바다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했다. 충도를 비롯해 도장리 척치리 동송리 동백리 등 김양식 집산지로 명성이 있었다. 1970년대 지주식의 김양식이 부유식으로 바뀌며 섬 전체가 김으로 먹고살았다. 그러나 80년대 김양식이 서해안으로 널리 퍼지며 김 값 폭락으로 다른 작물로 대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대체작물이 다시마와 미역이었다.

10여 년 전만 해도 다시마는 금일도에서만 나는 작물이었다. 전국생산량의 100퍼센트를 차지했다. 다시마 양식이 시작된 곳이 금일도이기 때문이다.
“70년대 말 지주식 발 막을 때 그 발에 포자를 붙여갖고 했었어. 그러다 나이론줄에 앵겨보고 함시롱 양식을 시작했제.” 할아버지는 “왜 ‘다시마’라고 부르는지 아냐”고 묻는다.

   
“첨에 몇 집에서 했는디 다시마를 사람들을 묵들 안 해. 묵을지 몰라. 일본에서는 다시마로 해묵는 음식이 30가지나 있다고 했는디 우리나라 사람들은 안 묵어. 판로가 없는게 애쓰게 한 것 다 망쳐 불었제. 그런게 다시마 한 사람들이 ‘다시는 안하마’ 그래서 ‘다시마’라고 그려.”
다시마 작업할 때도 그 말을 곧장 쓴다. 하도 손이 많이 가는 작물이라 “올해는 어쩔 수 없이 해도, 다시는 안하마” 하고 말이다.

일본 수출길이 조금씩 열리며 “밀가루라도 사먹고 여름 수박 한 통이라도 사먹자”고 했던 다시마 양식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전량 일본으로 수출되며 다시마 기르는 데 열을 올렸다.
조정갑 할머니는 “우리는 묵을지도 몰랐고 묵을 것도 없었어”라고 말한다. “튀김으로나 쪼까 해 묵고 다 일본으로 보냈어. 혈압 안 좋은 사람 밥 할 때 욱에다 다시마 올려놓고 다시마물 든 밥 해묵고 했제. 시방도 음식 해묵는 것은 없는디 미원은 안 먹제. 다시마에 디포리 넣고 푹 삶으면 고걸로 짐치 담그고 국 끓이고. 미원 친 것보다 더 맛나.”

해질녘이 되자 동네는, 밭 언저리는 다시마를 너느라 너도나도 바쁘다. 검게검게 물들어간다.
조정갑 할머니는 “인자 이 일도 다 끝나간디, 인자 좀 쉰디, 8월부터 또 양식줄 다듬고 뿔통 다듬고 또 시작이여. ‘다시는 안하마’ 해야 한디, 일이 어찌 그라고 된당가.”

 

출처 : 완도바닷가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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